서울 출신. 1882년 임오군란 때 청나라가 내정에 개입2025년 슬롯사이트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을 납치해 간 뒤 그를 귀국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민씨정권은 당시 승정원동부승지로 있던 김명규를 문의관(問議官)으로 톈진[天津]에 파견, 그 반대운동을 벌였다.
1885년(고종 22)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1889년에 톈진 주재 독리통상사무(督理通商事務)의 직함을 가지고 주로 대외적인 일에 종사하였다. 1892년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를 지냈고, 그 뒤 농상공부대신·학부대신 등을 역임하였다.
1898년 당시 의정부참정 박정양(朴定陽)이 관민공동회 발기인 윤치호(尹致昊)에게 정부측 요인들이 관민공동회에 참석할 뜻을 비추자, 이에 동의2025년 슬롯사이트 긍정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그러나 수구파들이 관민공동회에 관계한 인사들을 모략하기 위해 이른바 익명서사건을 조작2025년 슬롯사이트, 고종이 독립협회의 해산령을 내리고 관민공동회에 참가2025년 슬롯사이트 ‘가(可)’자를 쓴 대신들을 해임시킬 때 함께 면직되었다.
뒤에 다시 복직되어 임시서리의정사무(臨時署理議政事務)·학부대신 등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