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산파는 일제강점기 때, 만주 장백현과 함경북도 갑산군 등지에서 지하활동을 하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로서, 해방 이후 김일성파와 함께 북한 정치를 주도한 정치세력이다.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하던 김일성과 연계하여 ‘재만한인조국광복회’ 지부를 설립하고, ‘갑산공작위원회’라는 공산주의 단체를 조직했다. 해방 이후부터 김일성파와 함께 북한 정치를 주도했다. 1960년대 말에는 김일성의 후계구도 문제로 숙청의 대상이 되었다. 갑산파는 정식 명칭이 아니라 비공식적으로 통용되던 명칭이다. 중국과 소련 사이에서 독자성을 유지하고 두 세력을 활용하여 정치적 입지를 강화해 나갔다.
이들을 ‘갑산계’라고도 한다. 과거에는 김일성파를 갑산계라고도 불렀으나, 이는 잘못된 내용이다.
갑산파는 1930년대 중반까지 함경북도 갑산과 그 인근지역에서 공산주의 지하활동을 하던 인물들이 1936년∼1937년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과 연계하여 민족통일전선체인슬롯 머신 게임C7AC지부를 설립하고,‘갑산공작위원회’와 같은 공산주의 단체를 조직하는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역사에 등장하였다.
1937년 김일성의동북항일연군부대가 함경북도 보천보(普天堡)를 습격할 때 이를 도왔던 역할을 수행했으며, 이를 계기로 일제에 의해 거의 전원이 체포됨으로써 이들의 조직은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해방 이후에도 김일성파가 북한 정국을 주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1950년대부터 이들이 숙청되던 1967년까지 지도적인 지위를 누렸던 인물들이다.
갑산파는 북한 당국에 의해 정식으로 불린 이름은 아니지만,박금철(朴金喆)을 우두머리로 하는 일단의 공산주의자들이 1967년에 숙청되면서 이들에 대한 북한 당국의 부정적인 인식에 의해 비공식적으로 통용되던 명칭이다.
다른 한편 이들이 활동하던 일제 식민지 시기부터 1967년까지 이들이 동 명칭에 의해 하나의 파벌로 존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이들이 식민지 시기의 행적에 의해 상호간에 일체성을 갖는다고 볼 수 있는 근거는 있다.
6·25전쟁전까지는 이 정치세력들이 힘의 균형을 이루면서 연립 정권를 구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일성이 6·25전쟁 패전으로 조성된 정치적 위기를 수습하는 과정에서남로당파를 비롯한 대립세력을 제거하였고, 또한 1950년대 중반에 진행된 이른바 반종파투쟁 과정에서 갑산파가 승리함으로써 1958년까지 북한에는 김일성 중심의 확고한 권력기반이 구축되었다.
이들의 생성은 30년대 만주에서의 항일무장투쟁과정에서 이루어진다. 우선 이들의 항일무장투쟁은 중국공산당의 지도 하에 중국인들과 함께 수행했기 때문에 중국공산당과 밀접한 유대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중국과의 관계는 연안파가 더욱 밀접하고 소련과의 관계는 소련파가 더욱 밀접했다고는 하지만, 갑산파는 소련과 중국 두 세력 모두와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갑산파가 중국 및 소련과 맺고 있는 친밀성이 아니라 두 세력 사이에서 자신의 독자성을 유지하고 또한 중국과 소련을 활용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해 나갔다는 사실일 것이다.
또 다른 한 가지는 항일투쟁과정에서 보여준 핵심지도부의 강조, 대중성 강조, 근거지 중심의 투쟁 형태들이8·15이후 그들의 정치 활동에 큰 영향을 준 요소라는 점도 눈여겨보아야 한다.
항일투쟁과정에서 근거지 대중들을 지도하며 무자대열을 이끌 지도부에 대한 절실한 필요성은 8·15 직후, 지역별로 자생적 정치세력들이 난립하던 상황에서 통일된 지도부 건설의 중요성을 다른 어느 정치집단보다 강력하게 요구할 수 있게 했다. 이는 통일된 지도부 건설에 적극적이지 못한 집단들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가능하게 했고, 이후 북한의 독자적인 중앙권력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주도권을 잡아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대중과의 밀접한 관계는 항일무장투쟁 당시 무장세력을 충원하고 밖에서 이들을 보호할 수 있는 존재로서 일제의 막강한 병력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역시 사활적인 문제였다.
이러한 지도부와 대중과의 밀접한 관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던 이들은 8·15 직후 서울 중앙의 정치상황과 지방의 정기상황이 유기적이지 못했고, 당시 모든 정치지도자들의 관심이 서울의 정세에만 쏠려 있는 상황에서 이들은 지방으로 내려가 대중들을 직접 지도하면서 자신들의 노선을 관철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이들은 다른 정치집단에 비해 지역단위의 정치상황을 가장 총체적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대중에 대한 지도와 대중들의 이들에 대한 지지는 차후 권력을 형성해 나가는 데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었음이 분명하다.
항일무장투쟁의 형태였던 근거지노선은 8·15 이후 자주적 독립국가 수립의 방법으로써 ‘민주기지노선’으로 변화한다. 그 내용은 소련군이 진주하고 있는 유리한 조건을 이용하여 한반도 내에서 북한을 조선혁명의 기지, 즉 커다란 근거지로 설정하고, 이 근거지를 바탕으로 전 한반도를 해방시켜 자주독립 국가를 수립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의거해 8·15 직후 북한을 민주기지로 건설하는 것이 우선적 과제로 제기되었고, 이를 수행하기 위해 북한에서의 신속한 사회개혁이 강력히 추진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노선은 소련의 입장에서도 자국의 이해를 관철시킬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기도 했다. 다만 미국과의 관계에서 소련이 독자적인 행동을 취한다는 비판만 받지 않으면 되는 것이었다.
북한 지역에서 신속하게 사회주의적인 개혁이 추진되어 최소한 한반도의 반쪽에서 친소정권이 수립될 가능성이 높은 ‘민주기지노선’은 소련의 대한반도 전략에 비추어 보아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8·15 직후 ‘민주기지노선’ 주장은 당시 일국 일당주의원칙에 의해서 전면적으로 인정될 수 없었고, 초기에는 북한의 체계적이지 못한 조직상황에 대한 비판과 극복방향으로써의 의미가 더욱 강했다.
여타 정치세력에 대한 비판도 ‘민주기지노선’이라는 단계론적 노선을 수용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보다 체계적인 통일조직으로 발전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핵심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정치세력들도 이러한 의미에서 김일성의 비판을 수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모든 정치세력들이 보다 통일적이고 체계적인 조직으로 발전해야 한다고 강조했던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민주기지노선’은 오히려 북한지역에 한정된 조직노선의 성격이 강한 데 있는 것이다.
당시 남한에서 점차 심화되어가고 있었던 주적으로서의 미군정과, 민중들의 투쟁에 대한 올바른 해결책의 제시 없이, 비록조선공산당의 형식적 지도하에 있었지만 전술적 차별성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조선공산당과 전략적 통일을 위한 계획 없이, 북한의 선진지 구축만을 강조한다면 당시 소련군이 진주하고 있던 상황에서 그 노선은 남한까지 관철될 수 없는 한계를 이미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조선공산당이나 갑산파가 범한 오류 중 공통적인 것은 국제 정세에 대한 지나친 낙관(미 · 소 협력관계가 지속될 것이라는)이었으며, 이 ‘민주기지노선’도 미 · 소 전제로 해야만 전 한반도의 통일조국수립이 가능한 노선이었다.
이상 위의 내용을 살펴볼 때 갑산파는 비록 한계 지워진 것이지만, 소련의 진주라는 유리한 외적 조건 속에서 토지개혁 등의 급속한 개혁을 추진함으로써 민중의 지지와 신뢰를 획득했고, 통일된 권력체계를 형성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수행한 결과 타 집단에 대해 헤게모니를 확보할 수 있었다. 즉 당시 한반도의 과제수행이라는 점에서 볼 때에는 그 한계가 드러나지만, 북한이라는 한정된 지역에서는 상대적으로 설득력 있는 전략 · 전술을 수행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후 갑산파의 주요 인물들이 북한정권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데, 1960년대 말에는 김일성의 후계구도 문제로 갑산파도 숙청의 대상이 되었다. 갑산파 숙청 과정을 통해 정치적으로 부상한김정일은 후계자로 자리 잡고 이후 김일성을 절대화하는 개인숭배작업이 가속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