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11월 북한공산정권을 구출하기 위하여 한국전에 개입한 중국공산군의 두 차례 공격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압록강·두만강선에서 후퇴를 하게 되어 12월 말 서부전선에서는 임진강선까지 밀렸으며, 동부전선에서는 12월 24일흥남철수를 단행하였다.
1951년 1월초 중공군은 3차 공세에 나서 주공방향을 서울에 두고 철원·연천쪽에서 4개군을 앞세워 서울을 압박하였다. 당시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 북방에 방어선을 구축하여, 서쪽으로부터 터키여단·미제25사단·영연방제27여단·국군제1사단 등을 배치하였으나, 중공군의 인해전술과 북한공산군의 중동부전선 돌파로 서울방어가 어렵게 되었다.
이에 미8군사령관 리지웨이(Ridgway,M.B.)중장은 서울이 중공군의 포격권에 들기 전에 주력의 철수가 필요하다고 판단, 서울에서 60㎞ 남쪽의 오산과 삼척까지 후퇴하도록 결정하였다.
따라서, 한국정부도 부산으로 철수를 시작하였으며 1월 4일서울은 중공군에게 함락되었다. 그러나 이번의 후퇴는, 6·25전쟁 당시의 경우와는 달리, 미리 준비되어 있던 유엔군의 작전계획에 따라 비교적 질서정연하게 이루어졌으며, 국군과 유엔군은 그로부터 2개월 후인 3월 중순 서울을 다시 수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