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창원 출생. 부모를 따라 일본에 건너가 동경에서 성장, 1945년 광복과 함께 귀국하였다. 1947년 국방경비대에 입대, 하사관으로 복무 중 육군종합행정학교 제5기로 입교, 육군소위로 임관되었다. 그 뒤 미육군보병학교와 공정학교(空挺學校)를 거쳐 육군본부 정보국, 합참의장 전속부관 등을 역임하였다.
하사관시절 박정희(朴正熙)·김종필(金鍾泌) 등과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함께 근무한 인연으로 5·16군사정변의 핵심요원으로 참가하여 박정희의 경호, 공수단 출동, 국무총리 장면(張勉) 체포 등의 임무를 담당하였다. 5·16군사정변 성공 후 박정희의 경호책임자로 발탁되었고 국가재건최고회의 발족과 동시에 경호대장, 그리고 1963년 제3공화국 출범과 함께 육군대령으로 예편하여 청와대경호실차장을 거쳐 1964년에는 경호실장으로 승진되었다.
이때부터 교육계와 체육계에 관여하여 학교법인 경남학원을 설립, 경남대학 이사장, 대한사격연맹 회장, 아시아사격연맹 회장직 등을 맡기도 하였다. 1974년 8월 15일 문세광(文世光)에 의한 대통령저격사건으로 인하여 경호실장에서 물러난 뒤 세계사격연맹 부회장, 1979년에는 제10대 국회의원(마산·진해·창원)에 당선, 민주공화당 체육분과위원장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5·16군사정변 이래 10년 가까이 대통령경호실장으로 재직 중 권력을 강화하고 이를 재산의 축적을 위하여 남용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1980년 5월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지목되어 조사를 받았다. 당시 계엄사령부 발표에 따르면 부정축재액은 77억 원이었다.
그 뒤 정계를 은퇴하고 체육활동에 전념하여 1979년 대한체육회장 겸 대한올림픽위원회위원장, 태릉푸른동산이사장, 아시아경기단체총연맹회장, 국제올림픽위원회(IOC)위원(1984),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부위원장직 등을 역임하였다.